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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쓰리랑

윤복희 나이 고향 학력 가수 뮤지컬 배우 원조 디바

윤복희 나이 고향 학력 가수 뮤지컬 배우 원조 디바 미스쓰리랑 16회 출연
 



1. 6살 때 아버지를 졸라 뮤지컬 데뷔, 그러나 부모님 일찍 세상을 떠나

 
윤복희의 부친 윤부길은 경성음악전문학교(현재 서울대 음대) 출신으로 '견우와 직녀', '콩쥐팥쥐' 등의 오페라를 올리고, 국내 뮤지컬을 창시한 인물입니다. 윤복희의 모친 고향선 역시 무용가이자 전통 창(唱)을 했습니다.
 
윤복희는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시면 성악 발성을 연습하셨고, 어머니는 국악 발성을 하셨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양쪽 발성을 따라 했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무대에 오르고 싶어서 안 된다는 아버지께 1년을 졸랐어요. 그러다가 우리 오빠가 가지고 있던 깡통 필통에 손을 넣었다가 손가락을 다쳐 피까지 났죠. 우여곡절 끝에 '딱 한 번'이라는 조건으로 선 무대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어요."
 
윤복희는 이 데뷔 무대에서 스스로가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어 '짠'하고 나타나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당시 유행하던 1952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넘버였습니다.
 

 
어려서 데뷔하는등 꽃길만 걸었을 것 같은 윤복희는 모친과 부친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소녀 가장이 됩니다.
 
윤복희는 "오빠(윤항기)는 학교에 다녀야 해서 아버지 친구 집에서 자랐고, 저는 돈을 벌기 위해 공연하러 다녀야 해서 여관을 옮겨 다녔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제가 가족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죠"라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아홉 살 때 합격한 미8군 쇼단 오디션은 그의 삶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반복되던 미8군 출연 심사에서 항상 최고 등급을 받았습니다. 재즈의 전설 루이 암스트롱을 따라 한 것이 그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1963년 워커힐 개관 공연에서 암스트롱과 함께 무대에 오를 기회도 얻었습니다.
 
윤복희는 "집에 있는 레코드를 들으면서 영어 가사를 외웠어요. 어린 나이였기에 오히려 금방 영어를 익혔던 것 같아요"라며 "대선배인 그분(암스트롱)과 무대에 선다는 게 정말 영광이었어요. 떨리지는 않았어요. '성자의 행진'(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불렀는데, 그분이 몇 소절 하면 저도 따라서 주고받으며 불렀어요"라고 말했습니다.

 
 

2. 필리핀, 싱가포르, 영국, 독일, 미국에서 공연

 
윤복희는 1964년 비행기에 올라 한국을 떠나 필리핀과 싱가포르 등지에서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싱가포르에서 만난 영국 프로모터의 제안으로 귀국 대신 4인조 ' 코리안 키튼스'(The Korean Kittens)를 결성해 영국으로 향했고, BBC에 출연해 비틀스의 '캔트 바이 미 러브'(Can't Buy Me Love)를 불러 큰 반응을 얻었습니다.
 
"영국 신문에 '비틀스 원곡보다 좋았다'고 나오는 바람에 유명해졌어요. 이후 독일(서독) 대통령 행사에도 초청받아 갔고, 미국에서도 빨리 와달라고 해서 가게 됐죠."
 
윤복희는 미국 공연 도중 CBS TV의 유명 방송인 밥 호프를 만난 것을 계기로 1965년 CBS 크리스마스 스페셜 방송에도 출연했습니다. 원조 K팝 한류 걸그룹이었던 셈입니다.
 
그는 "미국 공연 중에 밥 호프가 무대 위로 올라와서 'CBS 크리스마스 특집에 나와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얼떨결에 '매니저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관객들이 '세이 예스!'(Say Yes!)라고 소리를 질렀어요"라며 "그 인연으로 태국 방콕에서 머물면서 필리핀, 베트남 등을 다니며 위문 공연을 펼쳤고, 이것이 촬영돼 CBS로 방송됐습니다"고 전했습니다.

코리언키튼즈(윤복희는 왼쪽에서 세 번째)가 영국에서 공연하는 장면이다.

 

3. 윤복희를 항상 따라 다니는 단어 '미니스커트'

 
윤복희는 1967년 귀국해 국내에서 공연을 펼쳤습니다. 같은 해 '웃는 얼굴 다정해도' 등이 히트한 첫 독집 음반이 발매되었습니다. '미니스커트 열풍'을 불러온 재킷 이미지가 실린 바로 그 음반입니다.
 
그는 음반과 미니스커트 이야기를 꺼내며 "사실 저는 다 모르는 사건이었어요"라며 "당시 잠깐 귀국했다가 다시 해외로 나갔기 때문에 바빠서 (국내에서 화제가 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리사이틀을 열려고 하니 악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연습용으로 6∼8곡을 녹음했어요. 그런데 제가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이봉조 작곡가가 전화로 '연습용 녹음테이프가 너무 좋아서 이걸 음반으로 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알겠다고 해서 그분이 내신 음반이에요. 그런데 그게 히트했다던데, 저는 한국에 없었죠."
 
윤복희는 미니스커트 사진에 대해서도 "당시 신문 기자가 서소문 다리에서 찍은 것을 재킷 사진으로 하셨더라고요"라며 "당시 미니스커트는 미국에서 입던 스타일로 제가 직접 만든 옷입니다. 공연에서도 미니스커트를 많이 입곤 했어요"라고 회상했습니다.

 

4. 신앙과 '여러분' 노래의 히트

 
윤복희는 1976년 전주에서 대구로 가던 중 큰 교통사고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이후로 신앙 생활에 매우 열심히 임하고 있습니다.
 
제3회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그의 대표곡 '여러분'(1979년)은 사실 그의 신앙 고백과도 같은 노래입니다. 노래 속 화자인 '나'는 신을, 듣는 '여러분'은 인간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원작자의 설명을 알고 나서 이 곡의 클라이맥스인 '만약 내가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하는 유명한 무반주 내레이션을 들으면 느낌이 또 달라집니다.
 

 

5. 2번의 결혼과 이혼

 
첫 남편은 가수 유주용으로, 김소월의 시에 노래를 붙인 <부모>라는 노래로 인기가 있던 가수였습니다.
유주용의 아버지는 독일 유학파 출신 공학 박사였고, 어머니는 독일 분이었습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를 중퇴한 수재였습니다. 가수를 시작한 계기는 서울대학교 교내 장기자랑 대회에서 노래로 1등을 차지한 일이었습니다. 이때 20살의 윤복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주용과의 결혼은 처음에는 순조로웠고, 시댁으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결혼 후 전업 주부가 되어 경제 활동을 그만두고자 했던 윤복희의 바람과는 달리, 유주용은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뒷바라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수를 그만두고 윤복희의 매니저를 자처하였습니다. 윤복희의 증언에 따르면, 둘 사이의 불화는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남진의 말이 와전되어 스캔들 기사가 실렸습니다.
 
유주용은 그 기사를 윤복희에게 보여주었고, 남편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한 둘은 홧김에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주용은 미국으로 건너가 일반인 여성과 재혼하였습니다.
 
1976년, 스캔들의 당사자인 가수 남진과 결혼했으나 1979년에 이혼하였습니다. 이때 상황이 매우 복잡하여 남진이 윤복희를 폭행했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이후 윤복희 본인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 오히려 남진은 '피해자'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6. 의상 디자이너와 의상 숍의 꿈

 
대한민국 미니스커트의 원조 윤복희가 여전히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윤복희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제 의상은 제가 직접 만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의상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며 "의상 숍을 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전했습니다.
 
윤복희 프로필
본명: 윤복기 (尹福基, Yoon Bok Ki)
나이: 1946년 3월 9일 
고향:  서울시
본관: 파평 윤씨 (坡平 尹氏) 가족 아버지 윤부길, 어머니 성경자 오빠 윤영기, 윤항기, 언니 윤수현
학력: 한양여자고등학교 (졸업) 서라벌예술대학교 (무용과 / 중퇴)
종교: 개신교 (장로회 / 온누리교회)
직업: 가수, 뮤지컬 배우
데뷔: 1952년 뮤지컬 <크리스마스의 선물> 1967년 노래 <웃는 얼굴 다정해도>